'리뷰'에 해당되는 글 17건

  1. 2015.06.30 장미는 장미로 불리지 않아도 - 베어 더 뮤지컬
  2. 2015.06.30 죽음의 덫은 어디에? - 연극 데스트랩 (1)
  3. 2014.09.02 마약 같은 섹시함! 뮤지컬 <드라큘라> (1)
  4. 2014.08.18 질투, 우리의 삶과도 맞닿아 있는 그것, 뮤지컬 <살리에르>
  5. 2014.07.10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의 관객 모독
  6. 2014.07.10 신이 그에게 주신 것은 재능인가 재앙인가? 뮤지컬 <모차르트>
  7. 2014.07.01 화려함의 옷을 입은 사랑의 연가, 뮤지컬 <고스트>
  8. 2014.06.26 자유는 훔치는 거야, <보니 앤 클라이드>
  9. 2014.06.18 사랑과 전쟁을 뮤지컬로 감상한다면, 뮤지컬 <머더 발라드>
  10. 2014.06.18 색녀 아니고 열녀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장미는 장미로 불리지 않아도 - 베어 더 뮤지컬

  금기시되는 모든 것들은 매력적이다. 그리고 치명적이다. 그것들은 모두 독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가지고 싶으면, 희생해야 한다. 자신을 온전히, 버려야 한다. 뮤지컬 <베어 더 뮤지컬>은 금기시되는 것을 욕망했으나 자신을 온전히 버릴 수 없었던 두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베어 더 뮤지컬]


  보수적인 가톨릭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피터와 제이슨은 비밀리에 교제 중이다. 소극적인 성격인 피터, 학교 킹카인 제이슨. 두 사람은 기숙사 안에서 남몰래 포옹하고, 키스한다. 그들의 사랑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은 온 세상에 자신의 사랑을 외치고 싶은 법. 피터는 커밍아웃을 하고자 하지만 제이슨은 거부한다. 그들의 사랑은 연습 중인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과 교차되며 전개된다. 


[베어 더 뮤지컬]


  가톨릭 고등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동성애와 마약의 소재는 자극적이다. 하지만 뮤지컬 안에서 보여 지는 학생들의 모습은 지극히 전형적이고 그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모습 또한 어딘지 따뜻하다. 이상한 일이다. 190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보다 훨씬 더 자극적인 것들이 난무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청소년들을 상대로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피터와 제이슨의 의도치 않은 커밍아웃 속에서도 친구들은 그들을 경멸하지 않고, 부모는 그들을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피터와 제이슨 두 사람은 불행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문제는 그들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베어 더 뮤지컬]

  

  피터와 제이슨은 사랑하고자 하는 순수한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더불어 그것들을 자체적으로 제어하고 있는 어른의 모습을 갖고 있다. 그들의 방황은 지극히 그 나이 또래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가진 생각은 자체 검열을 통하여 세상의 통념을 벗어나지 않고자 하는 기성세대의 모습을 이미 닮았다. 거기에서 두 사람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한 면을 스스로 발견하고는 자신의 모습에서 실망을 하기 때문이다.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기하면서 피터와 제이슨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앞뒤 안보고 달려드는 사랑, 그 순수한 무모함과 다른 자신들의 그림자를 발견했을 것이다. 장미는 장미로 불리지 않아도 그 빛깔과 향기는 여전하다. 사랑도 마찬가지. 사랑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거기 있던 사랑은 거기 있는 법이다. 피터와 제이슨 앞에 놓여 있던 사랑은 거기 있었으나, 두 사람 모두 잡지 못했다. 그들이 이미 어른의 문턱에 와 있기 때문이다. 어른이라면 무모하지 않아야 한다는 자기 검열... 하지만 무모하게 굴지 못해서 괴로운 나이... 그들의 문제는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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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덫은 어디에? - 연극 데스트랩

  1978년 미국 코네티컷 웨스트포드에 자리 잡은 작가의 저택이 있다. 이 작가는 한 때 유명한 극작가였던 시드니 브륄이다. 그는 호러와 서스펜스를 주로 한 작품을 써온 작가로, 그의 서재에는 한때의 영광을 증명하는 공연 포스터가 여러 군데 붙어있다. 어느 날 그의 서재로 자신의 극작가 수업을 들었던 클리포트 앤더슨이라는 이름의 학생이 <데스트랩>이라는 희곡을 보내온다. 시드니는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희곡에서 발견한다. 데스트랩을 읽고 난 후부터 조금씩 내면의 광기를 드러내는 시드니. 그런 그를 바라보는 마리아는 불길함을 감추지 못한다. 급기야 시드니는 자신이 <데스트랩>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클리포트 앤더슨을 살해할 방안을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마리아는 그의 이야기를 거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간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시드니는 자신의 서재로 클리포드를 불러내고 <데스트랩>은 발동되기 시작한다. 


연극 [데스트랩]


  연극 <데스트랩>은 무엇인가에 매료된 사람들의 광기를 보여준다. 마리아를 제외한 등장인물은 모두 자신이 <데스트랩>의 주인임을 내세워 그것을 손에 쥐고자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음모를 꾸민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데스트랩이 되어 버린다. 연극의 줄거리를 따라가자면 한 편의 짜릿한 서스펜스 드라마를 경험할거라는 기대가 충분하다. 하지만 뭐랄까 ‘트랩’은 허술하다. 깜짝 놀라는 장면은 있지만 섬뜩함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뭔가 약하다. 오히려 섬뜩함은 시드니와 클리포트 사이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지금 부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앞으로 이 공연을 보실 분들은 읽지 않은 것이 좋겠다. 


연극 [데스트랩]


  시드니와 클리포트는 서로 사랑한다. 그들 사이에 놓인 희곡 <데스트랩>은 심장이 약한 마리아를 완벽하게 죽여 버리기 위한 ‘트랩’이었다. 시드니는 클리포트를 살해하는‘척’했고, 그날 밤, 클리포트가 죽음의 문에서 살아오는 ‘척’ 했다. 죽었다고 믿은 클리포트가 다시 서재에 등장하는 순간 마리아는 심장발작을 일으켜 사망했고, 시드니와 클리포트는 서재를 둘 만의 공간으로 꾸몄다. 그 공간에서 그 둘은 다시금 ‘데스트랩’을 꾸며내기 시작한다. 자신들이 만든 완벽한 살인이 너무나 극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세상 밖으로 내 놓고 싶어하는 클리포트. 그런 클리포트의 행위를 막기 위한 시드니. 시드니는 서재 밖 자신의 세상으로 나가기에는 몸도 마음도 너무나 늙은 상태다. 현재의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시드니는 아이러니하게도 클리포트를 향해 위험 가득한 데스트랩을 놓는다. 이처럼 연극은 서로를 잡기 위한 덫을 놓아두는 인물에게 치중한다. 이 연극의 진정한 데스트랩은 자신이 완벽한 트랩을 짜고 있다는 인간의 오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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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같은 섹시함! 뮤지컬 <드라큘라>

공연 한 편을 보며 손에 진땀이 나는 것도 잊을 정도로 몰입해서 봤던 게 언제였던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것은 한참 오래 전이었던 것 같다. 이 느낌을 내 신체적 경험으로 말하자면, ‘라는 존재성을 잊고 극 속에 빠져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듯 한 극적 환상효과 같은 느낌이다. 이러한 경우에 빠지는 콘텐츠의 힘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현재 2014년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드라큘라의 경우는 바로 섹시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섹시함 또한 여러 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신체의 아름다움이 주는 섹시함. 쉽게 말해 육체적 관능미라고 하는 게 맞겠다. 둘째, 직업적 일을 할 때의 섹시함. 이것은 직업에 있어 몸담고 있는 능력이 어필될 때 묻어나는 섹시함으로 말할 수 있다. 셋째, 주변 상황 및 분위기 등 미장센이 만들어내는 섹시함. 넷째 성격에 의해 표정으로 묻어나는 섹시함 등 여러 가지의 섹시함이 있는데 드라큘라의 경우에는 이 모든 요소를 적절히 조화시킨 섹시함의 아이콘이나 마찬가지이다. 또한, 우리는 섹시함이라 하면 여성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릴 수 있는데 드라큘라에서는 단연코 드라큘라라는 남성의 섹시함이 어필되기에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첫 번째, 필자가 놀랐던 부분은 상황적 반전에 의한 드라큘라의 섹시함이다. 뮤지컬 드라큘라에서 드라큘라가 첫 등장했던 모습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의 호러 공포물을 보는 듯 한 이미지였다. 그 안에서 섹시함이란 이미지는 연상이 되지 않았고, 음습한 분위기로 긴장감만이 상승 되었다. 하지만, 드라큘라가 사람의 피를 빨아 마시고, 젊은 남자의 모습으로 변해 이 작품에서 보이는 진정 드라큘라의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그 모습은 이전 백발노인의 드라큘라의 모습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젊은 남성의 드라큘라모습이었다. 몸짓부터 음성 그리고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뿐만 아니라 외면이 바뀌며 내면 또한 바뀐 모습이었다. 음침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운명적 사랑을 갈구하는 로맨틱한 남성이 되어있었다. 그것은 분명 다른 사람이었다. 하나의 배우에서 탄생된 하나의 배역, 그리고 그 안에서 각기 다른 두 가지의 인물이 표현되었던 것이다. 가장 섹시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가장 섹시한 사람으로 변해있을 때, 극 도입부에서 우리가 봤던 드라큘라이미지의 기대선을 이미 그 순간 훨씬 더 넘어 올라섰던 것이다. 이것이 드라큘라를 보며 상황적 반전이 만들어낸 첫 번째 섹시미였다. 이 장면 이후부터는 드라큘라의 등장 때마다 관객들은 숨 죽여 바라보며 환호하고 탄성을 자아낼 정도였으니 말이다.

 

 

                 

 

드라큘라 즉 흡혈귀의 소재는 오늘날 관객들은 어렸을 적부터 익히 접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큘라의 존재에 관한 정보를 오늘날 관객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드라큘라하면 피를 빠는 존재, 불로불사의 존재, 햇빛을 무서워하는 존재, 박쥐를 다스리는 어둠의 왕 등의 정보로 시작되어 90년대 이전의 영화들에서는 드라큘라의 느낌은 공포에 가까웠지만, 오늘날로 다가올수록 섹시함이 더 강하게 어필되고 있다. 이 말을 서두에 하는 이유는 바로 뮤지컬 드라큘라의 미장센이 주는 섹시함을 말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드라큘라의 모든 정보를 본 작품에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바로 표현을 해준다. 그 표현이라 함은 배우의 연기도 물론 있지만, 탁월한 미장센의 효과 또한 컸다. 공연을 보는 내내 이것은 과학의 절정이라고 느낄 정도였으니 말이다. 무대를 보면 어디까지가 건축물이며 어디까지가 영상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여하튼, 극 중 드라큘라는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배우의 실제모습으로도 등장하며, 어둠 속에서 그래픽으로 처리된 박쥐들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기도 한다. 또한, 실제 환영과 같은 어두운 그림자, 백색의 그림자효과 등 철저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관 속에서의 등장 또한 말할 것도 없으며, 거인 같은 느낌으로도 등장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 효과로 하여금 어느새 관객들은 오감으로 드라큘라의 존재성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아가 이 미장센의 효과는 드라큘라를 마치 현 세계에서 볼 수 없는 미지의 세계 같은 섹시한 존재로 성장시켜줬다. 마치 그림에서나 볼 것 같은 미지의 인물이 주는 섹시함 말이다. 그림의 사과는 손에 닿을 없는 사과이기에 더 탐스럽듯이... 드라큘라의 미장센은 이 세계의 것으로 형언될 수 없는 이상적 섹시함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드라큘라의 섹시함을 더욱 강화시키는 척도가 되었다.

 

뮤지컬 드라큘라를 보면 사랑해선 안 되는 남자를 사랑하고야 마는 여자의 모습이 이해가 되듯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 본능적 매력. 거부하려야 거부할 수 없는 금단의 마약 같은 섹시함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모든 사람에게 냉혹한 남자가 자신의 여자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모두에게 공포의 존재로 비춰지는 남자가 자신의 여자의 눈에서는 로맨틱한 남성으로 그려지는 반전의 미학을 그대로 담아낸 존재가 바로 뮤지컬 드라큘라가 만들어낸 드라큘라이다.

 

관객들은 공연이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부터 드라큘라의 넘버가 시작되고 끝날 때마다 무대가 떠나갈 듯 한 깊은 탄성을 자아냈다. 또한, 박쥐의 움직임 소리와 환영이 보여주는 다크한 색채 그리고 피를 상징하는 진홍빛 색채의 이미지는 어느새 우리의 눈으로 하여금 드라큘라다 하는 기대감을 상승시켰다. 드라큘라의 몸짓, 언어, 미장센 등 그 모습 하나 하나가 왜 이렇게 섹시하게 느껴지는 건지... 그래서인지 드라큘라가 연일 거의 매진행렬을 달리는 이유가 스스로 납득이 되었다.

 

손에 닿을 수 없는, 이상의 세계에 있을 것만 같은 존재! 거부하려야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적 매력! 금단의 사과인 것을 알면서도 먹고야 마는 치명적인 섹시함! 이것을 나는, 바로 드라큘라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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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우리의 삶과도 맞닿아 있는 그것, 뮤지컬 <살리에르>

뮤지컬 <살리에르>에서 살리에르는 엄청난 노력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궁정악장의 위치에 오른 음악가다. 그는 천재성을 가진 모차르트의 음악성을 시기하고 그의 음악을 훔치기에 이른다. 그리고 또 다른 나 젤라스를 통해 모차르트에게 독약을 먹여 함께 파멸해간다.

 



질투란 욕심의 한 단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질투와 욕심이란 감정은 나의 시야를 흐리게 해 자신에게 집중할 시간과 감정을 빼앗는다. 본래의 내가 갈 길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뮤지컬 속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자신만의 음악 색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노력했으면 어땠을까? 악성 베토벤처럼 살리에르도 질투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만의 길을 갔더라면 뭔가 다른 성과가 나오지는 않았을까?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때로는 양날의 검이 된다고 여겨진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 노력하는 이는 그만큼 많이 갖게 되고, 더 많은 성과를 이뤄내곤 한다. 그리고 마음이 몹시 괴롭다. 자기는 아직 그처럼 갖지 못했다, 자신은 아직 부족하다, 끊임없는 박탈감에 시달린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질투를 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일에 있어서,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도 질투를 하며, 상처입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도 되고, 사랑을 잃기도, 찾기도 한다. 질투란 감정은 본능적인 것이기에 더욱 헤어 나오기가 힘든지도 모른다.

 

뮤지컬 살리에르는 살리에르와 모차르트의 선율 속에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는 질투의 감정들을 녹아냈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노쇠한 살리에르와는 달리 진지하고 젊은 캐릭터의 살리에르는 신선함을 주고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시선의 살리에르를 보는 재미를 준다.

 



희곡, 영화에 이어 뮤지컬로까지 재탄생된 질투의 화신 살리에르는 젤라스의 등장으로 질투의 감정이 더욱 폭발한다. 살리에르는 젤라스를 부정하지만 결국 그도 또한 자기 자신이다.

가장 나다운 나, 그 본연의 자신을 발견하고 이 세상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는 기쁨은 인생의 보람된 수확이 아닐까? 모두에게 인생은 쉽지 않은 것이다. 뮤지컬 속 살리에르가 자기 본연의 음악에 집중하려 애썼다면 어쩌면 그의 음악은 모차르트의 것만큼 사랑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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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의 관객 모독

나는 친구와 밥을 먹으면서 사랑을 비를 타고를 본다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는 그 작품은 아주 좋은 작품이라고 자신은 감동했다고 말했다. 나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친구를 떠올렸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말했다. 방금 사랑을 비를 타고봤어. 그녀는 대답했다. 그건 아주 좋은 작품이야. 나는 말했다. 아니야, 아주 형편없는 작품이야. 그녀는 말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나는 말했다. 90분은 너무 길어. 고문당하는 시간으론 너무 길어. 그녀는 웃었다. 그녀는 대답했다. 왜 끝까지 봤지? 나는 말했다.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어.

그렇다. 좋은 작품이었던 시절도 있다고 했다. 그건 아마 지금 작품으로 다시 만들어지기 이전, 그것은 한국 창작 뮤지컬 역사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형제가 나란히 앉아 피아노를 치는 장면에 대해 나는 또 얼마나 들었는가. 남경주와 최정원과 오만석 등의 한국 뮤지컬 명인들의 연기는 또 얼마나 섬세했을까. 그 시절은 전설처럼 아름다웠지만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비를 타고는 제목만 유지한 채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과거의 영광을 찾을 수 없다.

나와 내 친구는 좋은 예술 작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니 우리는 예술 작품만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 진정성에 대한 대화였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애티튜드에 대한 대화였다. 그런 면에서 나는 불쾌함을 토로했다. 나는 뮤지컬을 제작한 이들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다. 나는 피로했으며, 화가 났다.

이유는 명확했다. 그 뮤지컬은 못 만든 뮤지컬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기만하는 뮤지컬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음악에 대해 말할 순 없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기만 할 뿐, 전문적인 지식과 감식안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극작에 대해, 연기에 대해, 연출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성의에 대해, 기만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나는 제작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나는 할 수 없었다. 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두 가지 층위의 이야기는 긴밀하게 연결되기는커녕 제 각각의 이야기조차 완성도가 떨어졌다. 가령 주인공들의 사랑은 왜 이전의 복선과 정서의 축적이 없이 갑자기 시작되는가. 내가 원하는 건 순문학적 디테일이 아니다. 서정시적인 물질화까지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TV 드라마에서도 흔히 나오는 사랑의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흔한 장치들이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우연히 여자가 차린 음식을 먹고 여성스러움을 발견한다든지, 혹은 예상치 못한 스킨십 후에 상대가 이성으로 보이게 된다든지.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런 요소는 일절 없다. 서로에게 남녀의 호감은커녕 인간적인 호감도 없던, 아니 얼마간의 경멸과 경계를 내포하고 있던 둘의 관계는 느닷없이 사랑으로 발전한다. 나도 연애를 해봤다. 다른 관객들도 해봤다. 우리도 알고 있다. 때로 어떤 사랑은 아무런 계기가 없는 것처럼 시작된다. 그것은 마치 디지털적 명멸처럼 어느 순간 나타난다. 우린 팩트로써 알고 있다. 하지만 내러티브 예술에서의 핍진성은 다르다. 그것은 극 내부에서 획득해야만 한다. 반드시 감상자에게 자신들의 감정 변화를 납득할 수 있는 단서를 던져줘야 한다. 감상자들은 언제나 두 주인공의 사랑을 믿고 싶기 때문에, 그럴 적극적인 마음 상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조악하고 클리쉐적인 단서를 던져준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배려가 없다. 나를 비롯해 몇몇 관객들이 그들이 갑자기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괜히 키득거린 게 아니다.

또 하나의 핵심 서사, 즉 애인을 찾아온 귀신 서사 또한 잘 짜여 있지 않다. 이것도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주 재능 없는 문창과 학생이라 할지라도 죽은 애인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짜낼 때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서스펜스를 단계적으로 배치하려 할 것이다. 당연한 게 아닌가. 그게 일반적인 현대의 대중 내러티브 구조다. 만약 대단한 창의력을 발휘한 작품을 만들거나, 비대중적이고 메타적인 서사를 기획했다면 다르지만, 이 작품처럼 대중적인 작품에서는 뻔한 구조를 차용하기만 해도 좋았다. 그것은 이렇다.

작은 단서로 인한 의혹 발생 -> 작은 단서들이 취합되며 의혹은 서스펜스를 발생시킴 > 서스펜스는 새로운 감정과 새로운 상황을 끌고 들어옴 -> 극에 달한 서스펜스와 감정 -> 해소

  사랑은 비를 타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떤 긴장도 없었다. 이 극에서 귀신의 역할은 두 주인공이 만나는 계기를 만드는 매개체였을 뿐이다. 어쩌면 둘의 사랑의 계기까지도 귀신이 해준 거라고 극작가와 연출은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다. 당신들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일반적으로 귀신이 영매를(이 작품에서는 남자 주인공) 보내는 서사의 핵심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매 서사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발생하는 건 영매를 통해 살아 있는 사람이 기시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시감의 반복은 점층적으로 진행되고 어느새 그것은 과거의 감정을 일깨우게 된다. 이때 영매가 극의 전면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그 기시감의 대상이 영매여야 한다. , 기본적으로 이 세상에 귀신은 없다란 과학적 사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감정을 쏟았던 대상의 무엇인가를 연상하게 하는 영매. 이 두 가지가 핵심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여주인공은 귀신이 자신의 곁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하는 말을 영매가 전달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때 과연 여주인공이 영매를 사랑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더군다나 이 작품처럼 영매-남주인공과 여주인공 사이의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는 에피소드가 전무한 채, 전적으로 귀신과의 기시감만을 드러내는 에피소드가 나열됐을 경우에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극에서 가장 짜증이 났던 부분은 극작이 아니었다. 한국 창작극 중에서 형편없는 극작으로도 창피한 줄 모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난 이미 그들의 뻔뻔함에 질릴 대로 질려 있었다. 내가 짜증 난 부분은 이거다. 왜 그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배우들의 끼부림을 통해 극복하려고 하는가이다.

이 작품에서 제대로 연기를 한 배우가 하나도 없었으며, 그들의 연기는 형편없다 못해 끔찍한 수준이었으며, 보는 내내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심지어 훌륭한 연기를 한 것도 아닌데, 강아지 역을 맡은 배우가 대배우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마 누군가 그 극을 보고 그에게 연기 잘했다고 한다면 그 배우는 곧이곧대로 듣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누린 반사이익일 얼마나 컸는지 안다면 말이다.

이 정도에서 끝났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불쾌감까지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전술했듯이 이 극에서 배우들이 심각하게 끼를 부린다고 느꼈다. 끼를 부린다는 관용어구의 모호함으로 표현해서 미안하지만, 이 이상의 표현이 또 있을까 싶다. 난 그래서 등장인물 중 대부분이 아이돌인 줄 알았다. 아이돌 특유의 그 철없는 끼부림이 있지 않은가. 자신이 참여하는 작품(그것이 노래든, 드라마든, 극이든, 예능이든)에서 자신들의 노력 부족과 재능 부족을 끼부림을 통해 극복하려는 경우. 보는 사람이 멍해질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귀여운 제스쳐라도 그들의 팬들은 꺅꺅 소리를 지를 것이다. 이 작품에서의 배우들이 딱 그랬다. 그래서 나는 이들은 내가 모르는 아이돌들이라고 생각하며 작품을 봤던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볼까? AB에게 깊은 호감을 품고 있다. 이때 BA의 호감을 사기 위해 작업 C를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A가 자신에게 가진 호감에 반응하기만 해도 A는 열광할 것이기 때문이다. , 어린아이들이 자신들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일가친척들 앞에서 별 재주를 부리지 않고 발을 동동 구르기만 해도 환호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난 그들의 연기가 그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린 성인이다. 성인 관객이란 아주 냉정한 법이고, 우린 그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사랑스러운 조카의 찡긋거리는 눈 장난이나 보려고 앉아 있는 게 아니다. 그따위 팬클럽 앞에서나 할 법한 재치도 센스도 없는 무작정의 귀여운 척을 보려고 앉아 있는 게 아니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건 그들의 의지가 아닐 수 있다. 연출이 시킨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왜 그래야만 했을까. 애초에 연기를 무지막지할 정도로 못해서 그런 게 아닐까? 애초에 배우들의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 한계가 명확한 이유는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닐까?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결론까지가 너무 성급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남자주인공이 핸드 싱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의 아마추어적인 절박함에 화가 났다. 프로의 절박함은 그것과 다르다. 연기를 못한다면 다른 부분이라도, 그러니까 반복해서 연습하면 나아질 수 있는 그런 단순 노동에 가까운 연기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 그것도 못했다는 건 뻔할 뻔자 아닌가.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작품의 극작가도, 연출가도, 배우도 다 성의가 없구나. 그들이 놓치는 부분들을 난 재능의 부재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놓친 부분들은 고급한 예술적인 부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화책이나 TV드라마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플롯을 놓쳤고, 평범한 연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배우를 섭외하지 않았으며(대학로에 적당한 정도의 연기라도 할 수 있는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의 모자란 연기를 끼로 채우게 했고, 자신들이 연기할 배역을 연구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단순 반복만으로도 향상될 수 있는 연기적 부분을 소홀히 했다.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언제나 이런 형편없는 공연에 들어간 비용을 떠올리고 만다. 45000. 데이트로 생각한다면 두 명, 90000. 저들은 구만 원이 우스운 걸까, 아니면 관객의 수준이 우스운 걸까? 자신들이 적당히 술 마시고 놀고 하면서도 작품을 완성시키면 바보처럼 턱턱 돈을 내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난 올해 본 연극 중에 ‘S다이어리가 가장 연극 같지도 않은 연극, 극작이 가장 형편없으며 의식도 없고 무식한 연극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볼 때 사랑은 비를 타고는 그보다 더하다. 적어도 S다이어리는 배우들이 개인 기량으로 관객들을 웃기기라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제안하고 싶다. ‘사랑은 비를 타고의 제작자들은 객석에 앉아서 관객들과 함께 극을 감상해 보라고. 배우들이 어색한 표정으로 끼를 부릴 때마다 객석이 얼마나 싸늘해지는지 지켜보라고. 남녀 주인공이 사랑의 감정을 노래할 때 무표정하게 조소를 날리는 관객이 얼마나 많은지 지켜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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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그에게 주신 것은 재능인가 재앙인가? 뮤지컬 <모차르트>

신이 내려주신 천재성은 인간이 감당하기 버거운 것일까? 모차르트. 그의 천재성은 이미 어릴 적 음악시간에 익히 들었듯이 세 살 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다섯 살 때 작곡을 하는 등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조그마한 아이가 연주하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열광하고 그의 아버지는 그의 천재성으로 후원을 받으며 재능장사를 한다. 이것이 아마도 모차르트에 불행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뮤지컬 모차르트에서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파파보이처럼, 천재적인 작곡가이지만 작곡을 제외하고는 혼자서는 오롯이 서있을 수 없는 사회생활을 못하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피라냐처럼 달려들며 연약하기 그지없는 그의 살점을 뜯고 피 흘리는 그를 사지로 내몬다 

 

 

 

 

이를 보며 나는 자꾸만 현실과 겹쳐졌다.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과 그 속에서 혜성처럼 등장하는 어린 천재. 우리는 어른 천재보다는 어린 천재에 더 열광하는 듯하다. 조금이라도 어린 아이가 어른이 하는 그 어떤 것들을 해냈을 때 그 보다 더 잘해냈을 때 어른이 해낸 것보다 훨씬 더 관심을 갖는다. 그러기에 특히나 요즘은 어린 천재(?)들이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그들은 자의로 그들의 재능을 쏟아내는 것일까? 그의 부모 혹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 끌려나오는 것일까? 모차르트의 아버지 또한 그에게 넌 영원히 어린 아이로 남아야해라며 모차르트의 영혼을 가둬놓는다.

 

1막에서 나는 나는 음악에서도 2막에서내 모습 그대로에서도 모차르트는 끊임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해달라고 외친다. 지독하게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재능과 그것만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리고 온전히 자신만을 바라보고 사랑해주길 바라는 간절한 그의 바람이 후반으로 갈수록 너무 절절해서 가엾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버지와 누나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며 연주회를 하고 후에는 남작부인의 후원을 받으며 빈으로 가 작곡을 했던 모차르트. 5살부터 35살까지 죽을 때까지 피가로의 결혼마술피리’, ‘레퀴엠등 여러 유명한 작품들을 말하고 쓸 수 있을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평생 작곡을 했던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 신이 그에게 주신 선물은 재능이였을까? 재앙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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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함의 옷을 입은 사랑의 연가, 뮤지컬 <고스트>

필자가 기억하는 고스트는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내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 영화를 보지 않은 이가 없었더랬다. 그래서 얼른 비디오가게로 달려가 엄마아빠와 이 영화를 보았다. 너무 어려서인지 영화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고, 언체인드 멜로디 Unchained Melody의 선율만 뇌리에 강하게 남았던 이 영화. 이 영화를 수 십 년 만에 뮤지컬로 다시 만났다.

 

 

 

언체인드 멜로디는 뮤지컬 고스트에서 로맨틱하게 여러 번 옷을 갈아입으며 작품 전체를 감쌌다. 고스트의 뮤지컬 넘버들은 팝이나, 락음악 스타일의 옷을 입고 때론 편안하게, 때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1990년 작인 원작과의 시간차를 느낄 수 없도록 영화 속 스토리 외엔 뮤지컬 적인 요소들로 차별화하는데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판단이 들게 한 몇 가지를 꼽아보자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놀라움을 지닌 무대효과와, 오다메와 지하철 유령등 등장인물의 특징을 잘 살렸던 다양한 음악 장르와 장면의 연출이라 생각한다. 우선 첫 시작부터 범상치 않았다. 허름한 뉴욕의 어느 건물 무대 전면엔 투명한 스크린이 내려져 있었고, 그 안에서 배우들은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연인의 사랑이 시작되고 스크린에는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들이 펼쳐지며 관객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고스트의 무대 배경은 대부분 무대 뒤의 영상이 주를 이루었다. 이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표현하는데 아주 효과적이었고, 역동적이고 화려했다.

무대 전면에 사용된 움직이는 길과 같은 도구는 어찌 보면 단순해보이지만 배우의 움직임을 더욱 입체적으로 보일 수 있게 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등장인물의 다양한 공간으로의 이동을 상상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탄탄한 스토리의 원작을 베이스로 했기에, 안정된 스토리와 각 캐릭터의 특징은 무대 안에서 생생히 잘 살아있었다. 그리고 영화와는 차별화된 아이디어들이 있었다.특히 점술사 오다메와 지하철 유령이 부르는 음악은 극적인 설득력을 더했다. 오다메를 표현하는 찬송가스타일의 음악은 그녀의 특징을 더욱 극대화했고, 지하철 유령이 초현실적인 힘을 발휘하며 부르는 힙합음악은 지하철의 어두운 분위기와 유령의 성격을 드러내는데 효과적이었다. 내가 생각한 몇 가지를 비롯한 이 작품의 모든 요소는 샘과 몰리의 사랑의 힘으로 인한, 사랑의 힘을 위한 것이었단 생각이 든다.

 

샘은 사랑하는 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죽은 샘과 살아있는 몰리는 다시 만나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을까?”

 

이 힘은 작품을 끌고 가는 아주 큰 축이었다.

 

잘 만든 예술작품의 힘은 감상 후에 며칠 동안 또는 오랫동안 또는 평생 사람들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힘을 지녔다. 20년도 넘은 오랜 영화가 뮤지컬 무대에 되살아나는 순간 나를 비롯한 모든 관객들은 각자의 추억에 젖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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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훔치는 거야, <보니 앤 클라이드>

<1930년대 최고의 헐리웃 스타 보니 파커’. 그녀는 미국의 수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죽기 전까지 다양한 작품을 통해 명성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아 일평생 농부의 아들로 살아온 클라이드 배로’. 그는 텍사스에서 성실하기로 유명한 농부였다. 그는 평소 배우 보니 파커의 팬이었는데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보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자 취미였다.> 그 둘이 만나지 않았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보니 파커는 다재다능한 배우가 되었으며 클라이드 배로는 농부의 자식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80년이 넘도록 그들에 열광하는 우리들도 없을 것이다.

 

 

 

 

클라이드는 텍사스의 유명한 골칫거리였다. 장난감 총을 들고 동네를 누비는 어린 그를 보며 사람들은 대단한 도둑 나셨다고 생각했다. 그는 매일 훔치고 쫓기고를 반복하는 일상을 보냈다. ‘보니는 부유한 집안은 아니지만 미모가 뛰어나 카페 종업원이었다. 그녀는 최고의 여배우가 되길 원했으며 시시 때때로 본인이 직접 지은 시를 노래에 맞춰 부르기도 했다. 이 점에서 봐도 그 둘은 닮았다. 무언가 끝없이 갈망하는 것. 결국 그들은 보니 앤 클라이드가 되었고 목적지 없는 여행을 떠났다.

 

보니클라이드는 서해 번쩍 동해 번쩍 나타나 닥치는 대로 돈을 훔쳤으며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때문에 그들을 잡기 위해 미국에 내로라하는 경찰들이 한 곳에 모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오히려 그들에 열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만나면 겁을 먹기 전에 싸인을 받기 위해 종이와 펜을 건넨 사람들. 그들은 단순한 악당이 아니었다. ‘보니 앤 클라이드는 당시 사람들의 영웅이었다. 1930년대, 시대적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불경기는 계속 되었으며 곳곳에 은행은 파산이 났다. 하루 벌고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의 땅을 빼앗는 나라. 반항하는 자에게는 폭력이 돌아갈 뿐이었다. 정부는 자유를 억압하고 정해놓은 울타리 안에 사람들을 가둬 동물 다루듯이 사육했다. 그 울타리를 넘어 도망친 유일한 그들이 바로 보니 앤 클라이드’. ‘클라이드가 말했다. “자유는 훔치는 거야.” 많은 사람들이 꿈꿔온 모습을 그들이 이뤄냈기 때문에 영웅으로 추대한 것이다.

 

그들의 전반적인 일대기는 2시간이라는 시간을 함축적으로 할애해 무대에 잘 나타났다. 이번 공연의 주목할 점은 무대 뒤로 보이는 스크린. 바로 또 하나의 무대였다. ‘보니 앤 클라이드의 실존 인물들과 그와 관련된 자료 사진들이 스크린에 나왔고 보는 내낸 방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단순한 뮤지컬 연출보다는 시대적 상황을 잘 살려낸 작품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을 정도로 무대와 스크린을 정확하게 공존시켰다.

 

보니클라이드24살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들의 꿈이었던 멕시코로 떠나기. 하지만 결국 그 꿈은 무산이 되었고 미국에서 130발 이상의 사격으로 인해 사살 당하고 말았다. 그들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다. 참 이례적이다. 흉악범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도하고 슬퍼하다니. 그 모습만 봐도 그들은 더 이상 범죄자가 아니다. 자유를 훔치는 도둑이었을 뿐, 슈퍼맨과 원더우먼과 맞먹는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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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전쟁을 뮤지컬로 감상한다면, 뮤지컬 <머더 발라드>

어느 날, 누군가가 창작 작업. 엄밀히 말하면 글쓰기 작업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낸 적이 있다. “내용이 평범하면 형식을 새롭게, 형식이 새롭다면 내용을 단순하게 해야 한다.” , 그런가. 하고 넘어가고 나서 한참을 잊고 있었다. 그 사람의 결론대로 작업을 하는 경우는 거의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내용이 평범하면 형식도 평범하고, 내용이 새롭다면 형식도 새로운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까? 어쨌든 전략적인 글쓰기 방법은 뮤지컬에서도 필요하다.

 

 

 

 

 

살인의 대부분이 충동적인 것이고, 그것 가운데 대부분이 치정살인이라고 한다. 남녀 관계에서 살인의 충동은 시시각각 부지불식간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은 연애나 혹은 결혼을 해본 사람이면 납득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러한 평범한 살인 충동에는 관심이 없다. 살인으로 치닫는 남녀의 치밀한 심리와 분노, 그리고 좌절에 집중한다. 그러한 집중이 있을 때 사람들은 한 번 쯤 생각하게 된다. “그 놈의 사랑이 뭐길래...” 그러한 심리를 제대로 파헤친다면 두 사람의 만남과 사랑과 이별이 평범한 사람들의 그것과 다르더라도 우리는 그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드라마는 그 집중을 무시하고 있다. 무엇인가, 색다른 이야기를 찾고 또 찾는다. 그렇기에 <머더 발라드>가 누구나 해봄직한, 짐작 가능한 사랑 이야기를 선택했다는 것은 어쩌면 현명한 선택인 것 같다. 그렇다는 것은 섬세한 감정의 곡선을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창작자의 의지인 것 같으니까.

 

그렇다면, <머더 발라드>는 그러한 감정의 곡선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나? 일단은 짐작 가능한 방식으로 예스다. 이 뮤지컬은 모든 드라마의 과정을 노래로 진행하는 성 쓰루(Sung-through) 뮤지컬로써 무엇보다 음악으로 이야기의 진행이며 그 안의 감정을 담아내야 한다. 남녀의 격렬한 감정을 비트가 강한 음악에 담아낸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과 헤어짐의 시간을 음악으로 축약한 것도 성 쓰루 뮤지컬 형식을 제대로 활용한 것 같다. 흡사 TV에서 방영하는 <사랑과 전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스토리를 새로운 형식에 담아 낸 것 같다. 앞서 이야기 했던 그 누군가가 말했던 글쓰기 방법처럼 말이다. 그러한 방식이 묘하게 매력적으로 다가와 관객들의 마음을 흔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보고 나면 뭔가 헛헛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강력한 사운드에 함몰된 인물들의 감정을 엿보기만 했기 때문일까? 우리가 욕하면서 보는 막장 드라마 속에는 자극이 난무하지만 공감의 요소 또한 만만치 않게 난무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독성이 생기며, 그 중독성 때문에 오늘도 막장 드라마는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뮤지컬은 중독성이 있는가?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한 번 더 볼 것 같지는 않다.

 

사진_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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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녀 아니고 열녀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커플 이름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 이도령과 성춘향. , 변강쇠와 옹녀. 한 커플은 변함없는 사랑과 절개를 대표하고, 다른 한 커플은 분기탱천한 섹스의 대명사다. 춘향전을 읽거나 춘향가를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동령과 성춘향이 둘 만 있을 때 얼마나 요상 야릇한 짓거리(?)를 하는지는 알고도 남을 터. 하지만 성춘향은 청순하고 절개 있는 여인으로 숭상 받는다. 옹녀 입장에서는 속 터질 일이다. “내가 저년과 다를 게 뭐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는 유쾌하고 재밌다. 그리고 옹녀는 그렇게 야한 여자는 아니다. 그녀는 그저 유달리 센 팔자를 타고난 박복한 년일 뿐이다. 남자를 잡아먹는다는 속된 속설 속의 주인공 옹녀는 진정한 내 님을 만나기 위하여 노력하는 여성이고, 또한 그 님을 만났을 때 최선을 다해서 사랑한다. 그 님은 물론 변강쇠다. 우리는 변강쇠를 섹시한 남성으로 상상하지 않는다. 무식한 대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TV나 영화에서 섹시한 변강쇠를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대부분 희화화 되고 우스운 음담패설의 주인공일 따름이다. 그러한 남자에게 절개를 바치다니 옹녀는 눈이 삐었다고 하겠지만 생각해 봐라. 옹녀는 춘향이 만큼 체제 전복적인(?) 여인이 아니다. 그녀는 자기 주위에서 만날 수 있는 남자를 선택한 현실 순응적인 여자다. 하지만 그 남자를 주무르는 기술은 춘향이가 능히 본받고도 남을 만 하다. 자신의 남자를 지키기 위해 여자가 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총동원하는 그녀의 용기는 유쾌하고 건전하게 느껴지기 까지 하다

 

남녀를 불구하고 사람 셋만 모이면 시작되는 것이 그 얘기다. 그 얘기. 섹스 얘기. 섹스를 했던 얘기나, 섹스를 할 예정인 얘기. 아닌가? 아니면 아닌 척 하고 계속 해라, 섹스 얘기. ‘섹스라는 말이 거북하다면 살짝 말을 돌려 볼까. 우리는 음담패설을 기꺼이 즐긴다. 기분이 아주 좋을 때나 좋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떤 말을 하는가? 그 말들 속에는 늘 성기를 지칭하는 말이나 그 성기를 가지고 행하는 행위를 몇 글자의 단어로 만들어 놓은 것들이 포함된다. 아닌가? 아니면 아닌 척 하고 계속 사용해도 좋다. 어쨌든 음담패설은 우리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나는카타르시스가 비극을 볼 때가 아니라 말로 뱉어 낼 때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단적이 예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때문에 비밀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고, 누군가는 입으로 오르가즘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음담패설이 좋은 것이다. 후련해지니까 말이다. 그 후련함을 모두 함께 느끼기에 공연만큼 좋은 게 있을까? 특히나 변강쇠와 옹녀의 이야기라니. 재미질 준비는 모두 끝났다. 그러니까 보고 웃고 집에 가서는 맛보고 즐길 시간만이 남았다. 집에는 변강쇠나 옹녀가 없어서 그러질 못한다고? 그럼 말랑께롱.

 

사진_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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